말씀묵상(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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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7,60]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2024. 4. 16 화요일 스테파노가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라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뭔가에 홀린 것입니다. 참 주체란,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 실행하며, 그 일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사제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 피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린다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주체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하면 ‘악령’이 씌워 벌인 일입니다. 그러니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
2024.04.18 -
[요한 6,29]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2024. 4. 15 월요일 오늘 선택된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주님은 긴 말 않으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의 핵심이며 전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사순시기와 부활시기를 거치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의 전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이며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아왔고 받고 있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 없이 신앙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등의 결심은 나와 공동체를 지치게..
2024.04.18 -
[루카 24, 39]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2024. 4. 14 주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용서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예전의 모습으로 부활하길 원합니다. 그 사람의 육체가 지닌 모습에는 소중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부활했다는 사실은 용서이면서 동시에 서로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활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나의 과거와 현재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지닌채로 부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기억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때론 벗어..
2024.04.18 -
[요한 6,9]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2024. 4. 12 금요일 오늘 복음에서 제일 돋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이 ‘어떻게’ 쓰여 질지도 모른 채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어린이입니다. 그 아이의 두려움 없는 눈동자와 웃음이 선합니다. 그에 비해 제자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돈으로는 기껏해야 ‘저마다 조금씩’ 먹을 수 있는 빵마저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근심어린 표정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제자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합니다. 어두웠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해 집니다. 이제 그들도 걱정 없이 내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쓰여 질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내 맡긴 어린아이의 마음. 하루를 시작하면서 산적한 문제..
2024.04.18 -
[사도 5,29]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2024. 4. 11 목요일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사랑해’와 ‘사랑해줘’라는 두 말로 요약된다는 것. 칭찬, 용서, 격려의 말들은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반면 비난, 단죄, 폄훼의 말들은 나를 공격하는 말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나를 사랑해 달라’는 사랑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제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말하는데 대사제들은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논하며 제자들을 또 다시 죽이려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사랑해 달라’는 그들의 애정 결핍과 그로 인한 공격에 대해,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응답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하느님의 그 언어,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용서의 말에 순종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말들에 상처 받기보..
2024.04.18 -
[요한 3,18]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2024. 4. 10 수요일 가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리고 하느님은 내 속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칭찬이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와 하느님 둘 다 내 깊은 속마음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판단하여 죄를 묻는 것은 ‘내 자신’이었지 하느님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양심을 주신 것은 어떤 것이 옳고 좋은 것인지를 알아 하느님의 ‘빛’안으로 나아가게 함이지 나를 단죄하여 마음의 고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신’ 그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지 않을 때, 우..
2024.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