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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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나해 26주일
지금 이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교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어떻게 같은 존재일 수 있는가?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왜 주장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한 개신교 신학자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교리들은 천지이고, 특별히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여전히 과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서, 믿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고 믿고 싶어서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던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이 해결된다고 달라지지 않는, 그저 궁금증으로 신학적인 질문들을 하고 우리를 조롱하는 듯 보입니다. 저에게도 가장..
2024.09.30 -
[욥기 1,21]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2024. 9. 30 월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습니다. 선생님은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시며 번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아낌 없이 장학금을 주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나누며 사신 어른입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아픈 사람으로 인해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습니다” 삶은 철저히 가난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인 분. 세상에 자기 것은 없으며 모두 선물로 받은 것이니 아낌없이 나누는 어른이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다 여기고 슬퍼하는 것은 물질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 생기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마치고 떠날 때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지금껏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풍요로운 ..
2024.09.30 -
[마르 9,3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2024. 9. 29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한 개신교 신학자가 논리에 위배되는 신학 문제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만일 하느님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건 결국 내가 신 위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신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여야 합니다. 신은 늘 우리에게 포착되지만 신의 원래모습 그대로 포착될 수 없습니다. 신을 내가 포착한다면 신은 나의 피조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신비입니다. 오늘 선택한 말씀씨앗에서 예수님은 ‘작은 이들에게 죄를 짓는 사람’을 책망 하지 않고 ‘작은 이들이 죄짓게 하는 자’를 비난하십니다. 누군가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람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여 남과 자..
2024.09.29 -
[코헬렛 1,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2024. 9. 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을 ‘허무’라고 말합니다. ‘허무’의 체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낙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모든 것은 제 할 일을 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충만해지지 못하는 ‘허무’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고 보고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충만은 좋은 것을 더 많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짧은 인생, 우리의 체험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에 감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슬기를 얻고 충만에 이릅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
2024.09.26 -
[잠언 30,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2024. 9. 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얼마 전 청년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있던 일입니다. 가끔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를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는 말을 하자 한 청년이 대답합니다. “신부님께서 먼저 벽을 세우셨네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먼저 벽을 세웠으면서도 그들이 벽을 세울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시킨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보기 좋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내 안의 두려움이 만남과 친교를 유보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습니다. 문제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핑계’를 찾기 위한 구실일 뿐입니다. 허위와 거짓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오늘 잠언의 저자는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라..
2024.09.25 -
[루카 8,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2024. 9. 24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마이클 테일러라는 영성신학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를 읽고 묵상하실 때, 그리고 설교에 성공하시고 치유와 구마활동을 하실 수 있었을 때 아버지의 현존을 체험하셨다” 하느님 현존은 구체적인 체험 안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과 행위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 현존을 다시금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만나는 생동감 넘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길 희망합니다. 그분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잠깐이나마 드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의지한 용서와 베풂을 통해, 매사를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마음을 통해,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202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