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26주일

2024. 9. 30. 23:34말씀묵상/강론

지금 이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교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어떻게 같은 존재일 수 있는가?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왜 주장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한 개신교 신학자의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교리들은 천지이고, 특별히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여전히 과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서, 믿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고 믿고 싶어서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던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이 해결된다고 달라지지 않는, 그저 궁금증으로 신학적인 질문들을 하고 우리를 조롱하는 듯 보입니다. 저에게도 가장 궁금한 건 여전히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이면서 인간일 수 있을까입니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학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종교와 철학의 경계선이라는 지점에서 철학은 합리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내야 하지만 종교는 역설과 모순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A이면서 B라는 말은 모순이며, A이면 B가 아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N극과 S극이 같이 있듯 이 둘이 공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 때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믿는 종교의 신을 이해 못하는 종교가 있을 수 있을까? 그건 넌센스며 불합리하다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만일 하느님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건 결국 내가 신 위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영원히 불가지론이어야 합니다. 신은 늘 우리 안에 포착되지만 원래 신 그 모습대로 온전히 포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입니다. 신을 내가 포착한다면 신은 나의 피조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경건이며 겸손이고, 하느님께 인간이 드리는 자기 고백입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예수님을 알아서 확실히 믿을 수 있어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알고 싶고 더 믿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신앙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설명 할 수 없으나 그분이 나의 주님이어야 하고 주님이고 싶은 마음에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신앙의 알 수 없음으로 인해 좌절하고 방황하며, 때론 신앙은 무기력하다고, 우리의 세속적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넌센스라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무한한 하느님을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 포착하고 싶은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사람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리석은 집단이라고 말하며 비웃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읽을 때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구절입니다.

누군가를 죄짓게 한다면,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죄짓게 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죄를 지으면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죄를 짓게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어리석은 것이라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왜 믿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버리고 세속에서 살기를, 사랑과 희망과 믿음, 희생이라는 어리석은 가치를 버리고 물질과 명예를 위해 살라고 우리를 다그치는 것입니다. 꼭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이러한 비웃음과 불신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하느님이 이 세상의, 그리고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죄가 가장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얻는다 해도 참 생명이신 하느님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이하의 내용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참 주인이심을 저버릴 때, 우리는 눈과 손과 발로 보지 말아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손이 저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리라는 말은 하느님이 참 생명이심을 잊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우리의 유한한 지혜로 다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듯 보이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소하고 이해 할 수 없는 다양한 계기로 그분께 신앙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수천년의 교회는 우리보다 더 뛰어난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을 통해 인간의 이해로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을 한결같이 고백하고 믿고 따를 것을 알려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불신을 내려 놓고, 우리의 교만함을 내려 놓고,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싶고 믿고 싶은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