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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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2024년 나해 사순 1주일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때가 차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회개. 희랍어로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의 ‘메타’는 ~을 넘어서란 뜻입니다. ‘메타피지카’는 피지카를 넘어, 영어로 이야기 하자면 메타피직,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선, 그럼 어떤 학문일까요? 형이상학. 한자로도 번역이 잘 되었습니다.形而上學, 형체를 지닌 것 보다 위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학문입니다. 메타버스라는 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버스는 시내버스가 아니라 유니버스(Universe), 그러니까 현실의 세계 너머, 가상 세계인 것입니다. 그럼 메타노이아는 무슨 뜻일까요? ‘노이아를 너머선’이란 뜻이겠죠. 노이..
2024.03.11 -
[루카 4, 30]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셨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데 알아보지 못하는 완고함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의 선입견과 그 틈사이에 피어나는 하느님 신비를 보여줍니다. 나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아람임금의 요청에 이스라엘 임금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나 보다고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시라며 문제를 간단히 해결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자 나병을 고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냐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권유로 엘리사의 말대로 하자 몸이 깨끗이 치유됩니다. 복음에서는 나자렛에서 특별한 것이 나올 수 없다던 그들의 선입견을 깨고 메시아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2024.03.11 -
[요한 2,19]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는 면에서 거룩하지만 하느님을 그 안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위험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을 성전에 구속시켜서는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겨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적당히 예물 바치고, 주일 미사 참례하고는 이정도면 할 일을 했다고 여깁니다.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게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 나갑니다. 일상은 개선되지 않고 같은 괴로움과 후회가 반복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편의에 의해 쌓아올려진 신앙의 벽돌은 의미 없는 나만의 성전을 마음속에 건축하게 됩니다. 그 안에 계신 분은 하느님이 아닌 우상화된 자신입니다. 신앙은 자기 안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희생을 감내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
2024.03.11 -
[예레 17,10] 나는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天網恢恢,疏而不漏(천망회회,소이불루).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하늘 그물은 넓어서 성근 것 같지만 빠뜨리는 것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하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그 자리에서 상벌을 내리지 않아 당장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지만, 결국엔 그 행실에 따라 댓가를 치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행했던 과거의 삶이 지금 나의 인격이 되어 자신을 슬프게 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행했던 옳은 일들이 쌓여 덕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신' 것입니다. 부자는 제 가족들이 불구덩이의 괴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살아서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영원한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4.03.11 -
[마태 20,1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참 많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치맛바람과 함께 등장하고, 예수님이 마실 잔을 겁도 없이 마시겠다는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그 두 형제를 불쾌히 여기는 제자들, 이런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 등등.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잊고 있던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 “나는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슬픈 고백입니다. 어느 순간 이 말씀이 인간들의 뒤범벅이 된 욕망과 투쟁에 의해 화면 저 편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는·곧·죽·을·것·이·다· 이 때 모든 것을 멈췄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질투와 불안과 미래에 대한 청사진 등등 모두를. 그리고 미안해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어디..
2024.03.11 -
[마태 23,11]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우분들은 사제들에게 ‘성인 사제 되시라’고 인사합니다. 예전에는 그 인사가 하나의 덕담이지 실현 가능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인’이란 너무나 대단한 존재여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을 지향하지 않는 사제직이란게 있기는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제직이란 적당히 직무에 임하는 직업일 뿐이며 그런 사제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섬김을 사는 신앙인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김은 단순한 친절이나 일회적 봉사가 아니라 꽤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며 제때에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하는, 한마디로 섬김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삶 외에 또 다른 신앙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인사제가..
2024.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