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부활 대축일-파스카 성야

2024. 4. 3. 15:59말씀묵상/강론

내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영화 변산에서 시인을 꿈꾸던 젊은 청년이 지은 싯구절입니다. 노을이 아름다웠던 주인공의 고향. 한때는 만선의 꿈들이 넘실거렸던 변산의 작은 항구, 이제 모두 떠나간 폐항에는 슬픈 듯 붉게 물든 저녁 노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찬연히 빛나는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가난한 마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뽐낼만한 그 어떤 것이 없었으므로 아름다운 노을이 자신만의 광채를 온전히 뽐 낼 수 있었던 것. 동시에 아름다운 노을로 그 마을의 가난은 이제 더 이상 추하거나 슬픈 것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아 보잘 것 없고 가난한 것들이 뿜어내는 처절한 아름다움이여! 저는 갑자기 어제 성금요일. 우리가 들었던 이사야서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인 이 말씀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제까지 우리 앞에 서 계시던 예수님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바랄만한 어떤 모습도 있지 않은 비참한 인간이었습니다. 대사제에게 말대꾸 한다고 귓싸대기를 얻어 맞고, 옷이 벗겨지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던 그저 초라하고 볼품없이 매질 당하는 야훼의 종, 그분이 바로 우리의 스승 예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가난한 마을에 노을이 드리우는 것처럼 버려진 야훼의 종에게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는 사건이 오늘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7독서와 서간, 그리고 방금 들은 복음의 말씀까지 총 9편의 성경말씀을 들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 아브라함의 믿음, 이사악 대신 재물로 바쳐진 어린양,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스스로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 보이신 탈출 사건,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너를 잊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사랑고백. 이스라엘의 전 역사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려진 서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역사는 하나의 정점을 향해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되는지는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역사가 그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활의 영광스러움에만 현혹됩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건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이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이와 병행하는 루카 복음은 또 이렇게 전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사나 부활 사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제 들었던 초라하고 볼품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잠시 잊어버리곤 합니다. 노을이 빛날 수 있었던 가난한 내 고향을 잊은 것입니다. 어제의 비참함, 보잘 것 없음을 부활과 연관지어 영광스러운 것으로 비약시키곤 하는 것입니다. 루가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난하고 초라한 탄생을 천사들의 환호로 영광스럽게 장식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세상에서 내팽개쳐진 가난함과 초라함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은 맞지만 그 부활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잊게 만드는 그저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가.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속의 것과 언제나 반대 편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시고,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안에서 하느님이 보시기 좋았던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영광의 이데올로기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가 더욱 효과적이기를. 교회가 사회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신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내가 유능한 복음 선포자 혹은 봉사자가 되기를,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작은 사람이 되기를, 신자들의 숫자 보다는 그들과 소박한 사랑을 나누기를,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보다 더 낮아지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보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를, 유능한 복음 선포자나 봉사자 보다는 바보같은 사랑꾼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봅니다.

사실 부활은 이스라엘 전 역사를 관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주시려는 바보스러운 모습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모습, 바보가 되는 모습을 하느님은 마다않고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배반에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애 하시는 하느님. 당신을 죽이려 하는데 그 목숨을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내어 주시는 하느님. 당신을 살해한 것에 죄책감을 느낄 것을 염려하여 다시 부활하시는 하느님. 부활은 그래서 영광이라기 보다는 바보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이 우리 앞에 서 계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세상 창조주의 마음안에 사랑하는 이로 존재하는 우리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을까를 걱정할 것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 마음안에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로 있으니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주님은 바보. 내 스승은 가난하여 보여줄 것이 사랑밖에는 없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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