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3. 15:55ㆍ말씀묵상/강론
2024 성목요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밤입니다. 군중들의 열광과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라고 하시니 처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제자들을 부르신 것일 수 있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자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공생활 준비로서의 광야유혹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의 유혹을 오늘 이밤, 단순히 이겨내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에서의 첫 번째 유혹은 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해 보라’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이는 물질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람이 하나를 가지면 열을 가지고 싶고, 그래서 가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부자가 모아 둔 돈을 쓰려고 하는 그날 밤 하느님이 데려가셨다는 루카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 유혹은 죽어서야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며, 피이다. 이를 받아 먹고 마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빵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에 대해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 주심으로 이겨내십니다. 진정한 소유욕은 모아 둔 것을 나누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권세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높은 곳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가 세상 모두를 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높아지고 싶은 유혹이고 바꿔 말하면 낮아지는 것이 두려운 유혹이기도 합니다. 오늘 마지막 저녁 식사가 있기 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열망으로 그분에게 환호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모여 들었고, 악마가 유혹한 것처럼 세상을 소유할 수 있을 듯이 보였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영광을 받고자 하는 유혹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종이 주인에게 하듯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줌으로써 완성하십니다. 낮아짐입니다. 우리들은 낮아짐에 대해, 겸손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다툼과 상처들은 낮아지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숨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숨기고 있는 사실까지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표현된 우리의 약점들, 내가 숨겼다고 생각한 나의 컴플렉스가 폭로되는 순간 우리는 아프고 상처입고, 화나고 그 사람이 미워집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니 아픈 것입니다. 낮아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래야 한다고 몸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보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무신론적 유혹이며 가장 근원적인 유혹입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과 실패 앞에서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신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유혹이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도 가장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유혹들은 말 그대로 그분에게도 유혹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고통을 가장하였을 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유혹 앞에서 아무렇지 않았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3가지 관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어서 우리와 같지 않은 분이다. 그러니 그분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인간이셨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나중에 제자들이 그분을 신격화 했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참 하느님이셨지만 참 인간이셨고 그래서 우리들의 고통과 유혹을 그대로 겪으시고 이겨냄을 통해 당신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 번째의 것을 전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유혹은 말 그대로 그분도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번째의 유혹이 가장 끊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과 실패 앞에서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는가?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지금 저희 가정이 정말 힘들어요. 사는 게 고통입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에 성당 나오는 거 정말 힘들어요. 그렇지 않아도 사는게 힘들어서 고통 받고 있는데 성당까지 나가서 그 고통을 또 느껴야 돼요? 그리고 가끔은 정말 하느님이 있기는 한 걸까 의심하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높아짐에 대한 유혹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나면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가 남습니다. 모든 것을 잃기도 했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겠지요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모여들었던 수많은 군중들. 당신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자신했던 베드로의 고백. 그러나 다음날이면 군중은 돌변하고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죽음의 길에 동참하겠다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간 것입니다.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돌변하는 인간입니다. 남은 것은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마저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겪는 고통은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가진 것을 잃었을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말합니다. 그럼 하느님만이 남을 텐데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습니까?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신앙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은 끝이 나버립니다. 죽음입니다. 바오로가 코린토 1서에서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유혹을 끝까지 버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미사후에 하는 성체조배는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위해 기도하는, 적당한 선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이 사라진 나의 삶의 끝자락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새로운 희망을, 미련하고 어리석게 간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지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들을 가슴에 품고서도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만찬 미사를 마치시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여전히 이 마지막 유혹의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래도 하느님은 지켜주시겠지라는 최후의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내려놓지도, 거기서 도망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 안으신 것입니다. 인간 예수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유혹의 완성입니다. 고통을 받아안음. 그리고 그 결말과 희망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낳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그 새로운 길에 함께 할 수 있는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들이 밤샘성체조배를 통해 묵상해야 할 주제이며,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유혹의 마지막 단추가 될 것이고, 이 유혹은 신앙의 여정에서 끝까지 극복해야 하는 결정적 유혹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과 발 씻김을 통해 소유욕과 명예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을 인정하며, 타인에게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그리고 밤샘성체 조배를 통해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굳은 믿음을 이 미사중에 청해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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