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3. 15:57ㆍ말씀묵상/강론
오늘은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사순시기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예절입니다. 지난 40여일은 오늘을 향해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텅 빈 것 같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악기의 소리도 사라지고, 감사 미사도 사라졌으며, 제대를 덮고 있던 제대포도, 성당 곳곳의 성상들도 가려진 그런 날입니다. 이는 영광스런 모든 것들이 주님의 죽음으로 사라짐을 상징합니다. 또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꿈꾸고 희망했던 모든 일들이 그분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음도 아울러 상징합니다. 또한 새로운 생명을 움터내기 위해 제 모습을 썩게 만드는 씨앗처럼, 봄의 새 생명을 틔우기 위해 모든 것들을 떨구어 낸 겨울 나무처럼, 이 시간은 지금까지 세상이 욕망했던 것과는 다른, 사랑의 새 생명을 꽃피우기위해 침묵하며 비워내며 낮아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40여일의 사순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겸손하며 약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수난하시고 죽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분은 마치 들꽃 같은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들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이름도 없이 피어납니다. 그 꽃을 발견한 사람들은 잠시나마 위안을 받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공장을 짓기 위해 산과 들을 파헤칩니다. 아름다운 들꽃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앙심을 품지 않고 그저 짓이겨지고 뭉개져 흙더미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그들이 겸손하게 세상에 온 것처럼 그렇게 주목 받지 못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지도 못하고 또 다시 이름 없는 존재로 사라져 가는 것이죠. 사라져 가면서 원망하거나 복수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들꽃이 정말 온전히 우리에게서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인간들이 지어낸 아파트 구석구석에서, 단단히 다져진 시멘트 바닥의 틈 사이사이에서 그 꽃들은 또 다시 위대한 생명력으로 피어납니다. 그리고 외로이 찾은 산길과 들녘에서 꽃들과 눈을 마주친 모든 사람에게 다시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나 여기 있었다라고. 세상의 그 어떤 힘도 들꽃들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약하다 여겼지만 진정으로 강한 들꽃들의 겸손함과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목숨을 내 준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도 우리에게 들꽃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높고 위대하며 힘이 센 통치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분은 가장 낮으신 분이며, 겸손하신 분이고 약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연약함이야 말로 참된 사랑의 표징임을 당신 아드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들꽃들이 자신을 뽐내지도, 그들을 없애 버리는 이들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짓이겨도 또다시 세상 도처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다시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 지고 차갑게 변했다 해도 사랑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은 들꽃처럼 반갑게 다시 인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절망의 끝에서도 위대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사랑의 신비를 예감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떠나간 자리, 열광하던 군중이 사라진 자리,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내려지는 그 자리에 낯선 얼굴들이 제자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라졌다고 여긴 사랑의 생명력이 다시 움트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테아 출신의 요셉과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봄이 되면 여기저기서 들꽃이 만발하듯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그분은 또 다시 여기저기서 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마지막 시간인 이 밤. 사랑함으로 인한 낮아짐과 연약함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강한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예수님의 그 겸손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를 청해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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