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3. 11:42ㆍ말씀묵상/강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희생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김대건 신부님은 16세의 나이로 마카오에 건너가 신학공부를 하고 온갖 어려움들을 극복하여 25살에 사제가 된 뒤 1년도 채 안되는 사목생활을 하시다 순교하십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약종의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성인은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을 벌이면서 왕복 5천리 길을 마다 않았으며 교황청에도 성직자를 청원하였죠. 조선교구 설정을 가능하게 한 분이기도 합니다. 유방제 신부님, 샤승땅과 모방 신부님, 그리고 앵베르 주교님을 한국 땅에 오게 하신 분입니다. 1839년 기해 박해때 앵베르 주교님과 성인도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어제 어린이 미사를 하면서 두분의 순교성인과 복자에 대해 소개했었습니다. 한분은 잘 아시는 유대철 베드로 성인입니다. 성인 유진길의 아들이기도 한 유대철 성인은 아버지를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3살, 기해박해 때 스스로 자수합니다. 그리고 살이 뜯기는 고문을 받습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숯덩이를 형리가 입에 넣으려 하자 입을 크게 버리고 ‘자 넣으시오’라고 말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포청에서 14차례의 형벌, 100여대의 태형, 44대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4살의 나이로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또 한분은 지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때 124위 복자로 시복된 이봉금(아나스타시아)복자입니다. 복자의 아버지 이성삼(바오로)는 1827년 옥중에서 순교하셨고 그의 어머니 김조이(아나스타시아)와 함께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됩니다. 당시 나이 12살. 당시 그 어린 소녀가 안타까웠던 형리들은 배교하고 천주님께 욕을 하라고 하자 복자 이봉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곱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서 하느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부터는 하느님을 섬겨왔는데, 오늘 하느님을 배반하고 욕하라 하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천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라고 답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옥중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복자도 같은 해 12월 5일 전주감형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순교자들의 일화를 들으면 안타까운 마음과 비참한 수난과 죽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러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한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극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는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들이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된 그 사랑 때문에 죽음이 그분들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처럼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세상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과 일치된 관계를 갈라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된 그분들의 순교는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서 당신의 십자가를 다시 지시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육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한다는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이 바로 그분들 신앙의 열매요 우리의 참된 신앙안에서 그분들이 부활하는 신비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신앙을 기반으로 서 있는지 되돌아 봤으면 합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열망과 나의 안위를 위해 무언가를 청하는 그런 신앙의 영토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순교자들 신앙의 열매인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 죄많고 비천한 제 자신이오나 이 몸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우리 자신이 이러한 기도를 바칠 수 있을 때, 우리 순교성인들의 죽음이 우리 신앙인 안에서 다시금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참된 의미입니다. 이 미사중에 이러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마음 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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