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6. 18:14ㆍ말씀묵상/강론
제가 2015년도 신학교에 부임했을 때 제 방은 영성관 1층이었습니다. 창문 밑에 장미며 꽃들이 심겨져 있는 화단이 있었습니다. 그 해 봄. 작년 화단의 꽃들이 기운이 없는 것 같다며 직원분께서 그 곳에 퇴비를 뿌리셨습니다. 창문을 열면 고향의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냄새 맡기도 싫은, 화장실에서 얼른 물을 내려버릴만큼 보기 싫은 응가가 퇴비가 되니 꽃들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구나. 더럽다고 그냥 버려지면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들이 새로운 생명의 양분이 되기도 하는구나. 우리의 고통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했었습니다. 정말 뜬금없이, 금요일 저녁 성무일도 마침기도를 바치다가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신 주 하느님.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의 대가가 되기를 원하셨으니, 우리가 그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부활의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그분의 수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묵상을 해 봅니다. 수난은 고통입니다.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고통은 피해갈 수 없는 아픔이며, 인류는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했고 이를 통해 철학과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종교에서는 ‘고통’은 실상이 없으며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완성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난, 다시 말해 고통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단순히 받아들인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에 나도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매우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합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그곳에 함께 한다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희망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고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는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럽고 피하고 싶은 퇴비의 재료는 아무데나 버려지면 주변을 더럽히고 하천을 오염시키지만 꽃밭에 참여하면, 그곳에 함께 하면 아름다운 꽃들을 더 풍성하게 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퇴비를 만드는 그 재료(응가)안에서 우리는 꽃과 열매를 유추하거나 상상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딘가에 잘 쓰여질 때,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고통은 내가 계획한 대로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 고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어떤 열매를 주실지 모르지만 인내로써 믿음의 텃밭에 뿌릴 수도 있고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좌절과 실망의 하천으로 버릴 수 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영예로운 이름들이 호명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입에서 가장 영예로운 이름, 바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베드로가 이해한 그리스도와 예수님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을 예견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이 세상의 구원자에게 고통과 슬픔의 그림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고 구원되게 하소서.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좋고 아름다운 것만을 만나게 되길 바랬습니다. 그에게는 고통과 죽음은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이해한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이라는 꽃을 피우는, 수난과 부활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그렇게 당신의 수난에 참여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길에 참여하기 위한 일종의 티켓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통 만이 줄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내와 희망입니다. 인내와 희망은 고통이라는 자양분 없이는 절대 성장할 수 없는 가치들인 것입니다.
지난 세월, 혹은 지난 한 주간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냈던 고통을 우리 마음의 믿음밭에 뿌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려움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인내로써 희망의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 열매는 고통 가운데에서는 절대로 예상하거나 유추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열매임도 함께 기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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