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3. 21:40ㆍ말씀묵상/강론
우리 동기 신부들 가운데 여러분도 잘 아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바로 빠다킹 신부, 조명연 신부입니다. 매일 좋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배달하는 신부입니다. 그가 2년 전에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맘고생 크림 케이크’입니다. 여러 가지 예화들을 실은 책인데, 그 가운데 ‘맘고생 크림 케이크’와 관련된 내용도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우연히 빵집에 갔다가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케이크를 보게 됩니다. 케이크 이름이 ‘맘고생크림케이크’ 그렇잖아도 요즘 힘들어서 맘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맘고생을 하고 있으면 이런 이름의 케이크까지 생겼을까 싶었답니다. 그래서 빵집 직원에게 그 케이크를 가리키면서, “여기 맘고생크림케이크 하나 주세요”했답니다. 그런데 직원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네? 네?’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거요!’라고 말하자 그 직원이 ‘아 그거요, 망고 생크림 게잌이요!’
우리의 눈과 귀는 보고 듣는 기관입니다만 옳게 보고 듣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맘고생으로 마음이 지쳐 있는 사람에게 망고 생크림 케잌이 맘고생 크림케이크로 보이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총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총’자는 귀 밝을 총자요, ‘명’자는 눈 밝을 명자입니다. 우리가 총명하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지혜롭고 명석하며 똘똘하다는 뜻으로 생각하지만 총명함은 먼저 잘 알아듣고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꽉 찬 사람은 듣고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듣고 보려고 하는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 귀와 입이 막힌 사람입니다만, 만일 귀와 입이 들리고 말할 수 있다 해도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만 못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욕하거나 사건을 호도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듣고 말하는 것으로 악을 저지르게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듣는 능력이 좋다는 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첫째로 잘 말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잘 말하려면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으며, 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옳게 듣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옳게 들어야 옳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예능 프로에서 조세호가 유재석의 진행 능력과 재치에 감탄하면서 ‘형님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세요’하자 유재석이 ‘말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둘째로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들은 것을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아들은 말을 참 잘들어’라는 말은 우리 아들의 청각 능력은 상위 1%에 해당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잘듣는 아이라는 표현은 귀의 능력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들은 것을 몸으로 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잘 듣는 것은 잘 말하는 것이고 잘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는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듣지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을 고쳐주는 내용입니다. 잘 듣지 못하니 잘 말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제 1독서인 이사야서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내용은 유배에서의 귀환을 성취시켜줄 메시아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여기서 그 때란 메시아가 오시는 때, 유배에서의 귀한을 성취시키는 인물이 오시는 구원의 때를 말합니다. 구원의 때가 오면 제일 먼저 벌어지는 일, 바로 눈과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귀머거리가 고쳐지는 것은 단순한 질병의 치유나 그분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귀가 열린 것은 바로 이사야서의 예언, 메시아의 오심을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귀가 어떻게 열리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귀와 입을 열기 위해 행위하십니다. 이표현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자주 보았던,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는 것과 같은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메시아 사건이 완성되는 조건이며 그의 귀와 눈이 열리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듣고 보는 것의 원래 의미를 되찾는 것, 하느님의 창조 의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와 입은 불필요한 것을 듣고 말하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꽃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사용되지 않고, 황금은 쓰레기통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한 것은 귀한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그래서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면, 그것을 통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심하게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기관이 무기로, 악의 도구로 변해 버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일그러뜨리고 사람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이스라엘이 유배를 가게 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망각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살다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눈과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귀먹고 말 못하는 그 사람이 회복되고 제일 먼저 들었던 음성이 예수님의 목소리였음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이 제일 먼저 말한 것은 예수님의 구원 사건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듣고 말하는 능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오심을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듣고 또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의 귀와 입이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위를 할 때가 바로 구원의 때요,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에파타!” “열려라”. 우리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도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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