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19주일

2024. 8. 24. 10:22말씀묵상/강론

지난 주 저의 서품 동기 신부님들과 25주년 기념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45일간의 긴 여정. 한국도 더웠지만 제주도보다 위도가 한참 아래에 있는 나가사키는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더위였습니다. 이 시기에 성지순례를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일년 중 가장 덥고 습한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봅니다.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데 좋은 날씨와 계절을 골라 간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가 일부러 힘든 시기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날은 무더웠고 순례하는 길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순교의 고통에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일으키게 했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둘째 날 저녁부터 목이 칼칼하더니 오한과 몸살을 동반한 코로나에 감염되었습니다. 뜨거운 더위와 코로나, 순교성인들이 겪었을 환난과 고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번 순례는 저에게 남다른 인상을 각인시켰습니다.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성지는 26인 순교성당입니다. 159725. 26명의 교우들이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33일간 800킬로의 길을 걸어 나가사키에 있는 니시자카(서쪽 언덕)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양 옆구리를 창에 찔린 뒤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 가운데에는 12살의 루도비코 이바라키와 13살의 안토니오, 15살의 토마스 코자키도 있었습니다. 12살의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자신이 사랑하는 신부님과 어머니, 아버지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제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라는 용기를 보여주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의 순교 이후 나가사키에 있는 수 많은 신자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관자놀이에 구멍을 낸 뒤 거꾸로 매다는 고문, 상처 난 몸에 유황을 붙는 고문, 손가락을 자르는 고문, 무릎에 상처를 내고 깨진 도자기 위에 무릎을 꿇게 하는 고문등이 이어집니다. 이 고문들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배교할 것. 사실 순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배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은 매 순간 주어지는 배교의 유혹을 뿌리치고 신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 가운데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만, 삶의 매 순간 세속적 욕망과 신앙적 희생이라는 선택을 마주하게 합니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그래서 나는 배교하고 있는가 아니면 순교를 통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길과 하느님의 길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하도록 합니다. 오늘 제 1독서 열왕기 19장은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사제들과 겨루어 승리를 거둔 사건 뒤에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바알과 야훼 하느님 가운데 참된 신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다툼에서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이 증명됩니다. 바알신은 인간에게 풍요와 다산, 세속적 삶의 윤택을 선사하겠다고 약속한 신이었습니다. 그런 바알신을 대적하여 하느님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믿음에 대한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를 죽이려는 모함들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들에게서 도망하여 광야로 나와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며 한탄합니다. 더 이상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교의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빵 한조각과 물 한병에 기대어 다시 40일이라는 순례의 여정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끝에 호렙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는 윤택함과 풍요로움, 마음의 안정을 주는 바알이 아닌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가난한 하느님,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40일간의 광야는 배교인가 신앙인가하는 선택의 기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빵 한조각과 물 한병에 의지하여 신앙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이 빵은 엘리야가 의지했던 하느님의 빵입니다. 풍요와 안녕, 윤택의 바알이 아닌 사랑과 희생의 하느님이 내려주는 가난한 만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며 우리는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말하는가? 참으로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이러한 상식적인 질문들은 신앙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해 준 것은 무엇인가? 희생과 봉사 자기 나눔의 삶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나에게 닥친 다양한 괴로움들을 해결해 주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요? 배교인가 신앙인가. 바알신인가 하느님인가. 이런 고민 가운데 예수님은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빵과 물을 주신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한조각의 빵과 물한병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처럼 수많은 순교자들도 이 말씀에 의지하여 매일 주어지는 배교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이 말씀은 상식적인 해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입니다. 나를 선택하면, 그래서 나의 말과 나의 살을 받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죽음과 함께 사라질 지금 당장의 세속적 윤택과 풍요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따름으로써 얻게 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 이 약속을 마음으로 받아 먹어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배교하지 않는 것이며 그분을 선택하는 순교의 삶, 참된 신앙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매순간 선택이 주어집니다. 배교인가 신앙인가. 바알인가 하느님인가. 인간의 상식과 열망이라는 바알신이 아닌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여 순교자들의 삶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과 빵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힘에 의지하여 우리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이 미사 중에 청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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