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9. 22:42ㆍ말씀묵상/강론
정원을 거닐때면, 피어나는 꽃들로 내 마음에도 웃음꽃이 피어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누군가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말합니다. “그 때 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자 주변을 둘러 보아라. 내가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단다. 그러니 내가 너를 만든 까닭도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란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은 저 혼자 있기 위해서 살아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들을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꽃이 나를 위해 피었다면, 나도 누군가를 위해 피고 지는 것.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가진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나눌수록 그만큼 더 내 자신이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된다는 것은 늘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 된다는 것, 결국 사랑하여 책임지는 것.
그런데 세상의 다른 창조물들은 자신을 나누기 위해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찾아 가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나누기 위해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인간만의 독특한 지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창조에 동참하도록 초대 받았고, 하느님이 그랬듯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찾아 나서는 존재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그 창조의 이유가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하느님 창조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나는 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여라, 더 많이 찾아가거라.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기다리며 제자리에 있지 말고 더 많이 사랑하도록 그곳으로 떠나라. 파견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라는 말은 ‘가서 사랑하시오’ 여기서 사랑하지 말고 가서 그를 찾아가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마르코 복음인데 이와 병행하는 복음 가운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여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찾아오는’ 나라입니다. 내가 그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우리를 찾아 옵니다. 그래서 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강제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 나라가 인간을 향해 찾아오듯, 너희들도 그렇게 찾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파견됨, 복음의 선포는 그분의 공식적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의무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자신임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가치를 사랑의 나눔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꽃들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타인을 위해 그들을 찾아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파견의 소명,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실존적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선 복음에서 두 가지를 주문하십니다.
첫 번째로, 사랑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을 들을 때면 마음이 항상 찔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지고 가지 마라. 복음을 선포하는데 왜 너의 개인적인 물질들에 왜 관심을 갖느냐, 소유하지 마라. 하지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에 마음이 찔리면서도 동시에 용기를 얻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너 자신 말고는 필요한 것이 없다. 나만 믿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며 격려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면서 내가 능력이 더 많아야 한다거나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야 한다거나, 봉사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시간이 많아야 한다는 외적인 조건을 들이대지 마라. 봉숭아 꽃이 나리꽃보다 작고 색이 진하지 않다고 해서 그 꽃을 보며 너는 못생겼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봉숭아 꽃은 봉숭아 꽃대로, 수선화는 수선화대로, 나리꽃은 나리 꽃대로 더하거나 뺌 없이 자기 자신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사랑을 전할 때, 자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선포하면서 나는 충분히 아름답지 못하다거나 충분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나를 이렇게 창조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고 나누기 위해 떠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을 선포할 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성을 내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저 먼지를 훌훌 털 듯이 그렇게 다른 곳으로 떠나라. 사랑을 받고 말고는 그 사람의 몫이지 너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왜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느냐고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얼마나 봉사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니? 사랑은 속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꽃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꽃들이 아름다움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사라집니다.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라고 한번도 강요한 적이 없으며 선한 것을 좋아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을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선을 강요했다면 인간은 선에 복종했겠지만 그 때 인간은 하느님 창조의 동반자가 아닌 꼭두각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 품에 귀의할 가능성과 품위를 빼앗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뿐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는 다만 대화하기 위해 말을 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아름다운 내가 되기 위한 하나의 초대입니다. 찾아가서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며, 사랑을 강요하지 말 것. 내가 나 되는 것은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 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듯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존재해 주는 것. 오늘의 말씀을 잘 음미하면서 새로운 한주간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검암동 공동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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