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17주일

2024. 8. 24. 10:20말씀묵상/강론

2002. 제가 부평 1동 보좌 신부로 있을 때 만났던 한 어르신이 생각납니다. 세례명은 막달레나. 혼자 사는 할머니셨는데 매일 폐휴지를 줍습니다. 성당의 박스나 폐휴지를 그분에게 드렸습니다. 그리고 장터에서 기름과 떡들을 파시는 할머니셨습니다. 그런데 일년에 한번씩 공부할 돈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며 적지 않은 장학금을 기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께 당신 살기도 힘드신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셨냐고 감탄스럽게 묻자 그분은 누군가 해야할 일이잖아요하시며 부끄럽게 웃으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얼마전 부평 1동 교우분들이 찾아오셨길래, 막달레나 할머니 근황을 물었더니 여전히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지금도 그렇게 기부하시며 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강의중에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복음은 요한 복음 6장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표징을 보고 모여든 군중. 그 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고 요한은 전하고 있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 생활을 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된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이 한 체험 가운데 가장 강렬했던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통해 그들을 이끄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발견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다루면서 그 시기가 파스카가 가까운 때라고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로 배불리신 하느님을 연상하도록 합니다. , 예수님께서 바로 만나를 내려 주신 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설치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에게 빵을 전해줄 것인가?

 

사람들이 모이자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당신은 이미 오천명을 먹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과월절 가까운 때이므로 사람들에게 빵을 선사함으로써 당신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필립보에게 던진 우리는 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빵을 사기에 얼마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 빵을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참된 양식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즉 너는 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느냐는 믿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필립보는 아주 현실적인 답변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지금 우리 앞에 놓인 군중은 장정만도 오천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빵을 다 나눠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계산해 보자면 대략 200데나리온 정도가 들 것 같은데 그 것으로도 사람들을 배불리기는커녕 아주 조금씩 받아 먹게 할 뿐입니다. 그 때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어떤 아이가 가져온 음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안드레아 역시 필립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기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보리빵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미천한 능력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랑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우리의 패배의식과 닮아 있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와 대조적으로 그 어린 아이는 소박한 보리빵과 구운 생선을 가져옵니다. 보리빵은 서민들,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비록 소박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습니다. 군중들을 위해 애쓰신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 먹을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 정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것을 내어 놓습니다. 이러한 소년의 용기는 우선 예수님을 움직이십니다. 구약의 만나가 하느님의 일방적인 시혜였다면 신약의 빵, 생명의 빵은 일종의 대화이며 나눔입니다. 마중물로 내어 놓은 그 아이의 빵은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가득찰 정도로 남았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내게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용기 있게 자신의 소박한 능력을 봉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린이는 5000명을 모두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 반대로 해야 할 일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으로 도망가고 포기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나의 보잘 것 없는 능력이라도 그 일에 보태고자 하는 용기를 낸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스승이 바로 그 일을 해낸 분이십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 경쟁과 다툼, 탐욕과 소외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하느님의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을 온전히 구현해야 했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보같이 내어 놓으신분. 그것이 가능하다는 계산 때문에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희망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피와 죽음, 부활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이 나도 함께 그 길에 동참하겠노라고 하나 둘 모인 것이 교회이며,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속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는가라며 멀찌감치 구경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필립보와 안드레아의 처지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은 나를 기쁘게 하는 이야깃거리를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하신 그분의 삶에 동참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서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소박한 보리빵 다섯 개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실 것입니다. 아멘

'말씀묵상 >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중 나해 20주일  (0) 2024.08.24
연중 나해 19주일  (0) 2024.08.24
연중 나해 16주일  (0) 2024.07.25
연중 나해 15주일  (0) 2024.07.19
연중 나해 14주일  (0) 2024.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