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21주일

2024. 9. 4. 07:24말씀묵상/강론

몇일 전, 함께 신학교를 다니다 그만 둔, 그러나 지금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옛 동기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제가 점심은 먹었니라고 묻자 그 친구는 응 도시락 싸왔어. 이제 그거 먹어야 해하더군요.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수씨가 뭐 싸줬어?’라고 묻자 그 친구는 콧방귀를 뀌며 강휘야, 네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어떻게 겁 없이 도시락을 싸달라고 그래, 내가 쌌지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친구는 대뜸 저에게 그러더군요. ‘강휘야 넌 참 좋은 길을 선택한거야

 

사제가 되는 것이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이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그 선택을 감사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어떨 때는 그 선택으로 인해 후회하기도 합니다. 신앙 역시도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선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과 하느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6, 빵의 기적사화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앞의 내용들을 잠시 상기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빵을 먹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만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분이 바로 그 예언자가 아닌가하며 술렁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며 그들의 마음속 생각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순전히 물질적으로만,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그런 존재로 축소시키고 아울러 하느님을 사실상 완전히 제외시켜 버린 것입니다. 삶에서 영적인 부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난 주 복음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며 인간은 육신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것, 영적인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각성시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땅에 매어 있는 존재이지만 하늘을 올려다 볼 줄 아는 존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면서, 그 별들의 과학적인 내용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시초와 끝없는 우주의 광대함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빵으로 오신 당신의 의미가 땅에 매어 있는, 육신의 안위만을 갈구하는 그런 빵이 아님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께 사람들은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시 나이 30대 초반. 사회적 나이로는 지금의 30대 초반과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젊은 나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출신도 별 볼일 없는 사람. 그들은 현실적인 조건들로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30대 초반의 저 젊은 친구, 그의 부모도 그저 평범하고 비천한 출신의 사람, 그런 그가 우리에게 무얼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우리 조상인 모세는 만나를 주었고 율법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신의 살과 피를 준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가?

 

요한의 신학에서 빵은 모세의 율법이 육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원의식을 부여 받은 것, 그들이 참다운 인간으로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 1장에서 그 율법, 말씀, 로고스가 육화되었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율법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어 주어 동물과 구별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므로 율법이 스스로를 내어 주기 위해서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함으로써, 율법이 가진 원래 정신이 사랑임을 자신의 살로써, 그 살을 줌으로써 실현시켜 준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인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부여했던 하느님의 율법이 정말로 사람이 되었고, 살이 되었고, 그분은 그런 당신을 빵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의 선언은 포도주의 선언과 연관됩니다. 살이 피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육화된, 다시 말해 율법이 이 되신 분이면서 동시에 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전의 제사가 동물의 피로써 자신들의 죄악을 대신 기워 갚았다면, 이제 하느님 스스로 를 흘려 인간의 죄를 대신 갚아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으로서, 살로써 빵으로써의 율법이 완성되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살과 피를 먹으라고 준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은 그들이 여전히 동물적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살과 피를 이해함을 반증해 줍니다. 그 안에 담긴 희생과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빵을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만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도 떠나갔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남아 있던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질문은 제자들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중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의 신앙이 세속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좋은 직장을 얻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들이 대학에 붙게 해 주십시오, 집값이 오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닌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 걸려 넘어졌던,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갔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가 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살과 피로써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삶에 우리를 초대하신 빵과 포도주의 예수님. 우리는 오늘 이 미사가 끝나고 성당문을 나서면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 그분을 믿고, 힘들더라도 그분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시류에 끌려가며 맹목적으로 자신을 소비해버리는 그런 세속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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