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14주일

2024. 7. 9. 07:58말씀묵상/강론

예전 티비 프로그램 중에 영재발굴단이라고 있었습니다. 천재적인 아이들을 발굴해서 그 재능을 잘 키워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희웅이라는 어린 학생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꼬마였습니다. 희웅이는 대학교 수준의 화학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3개의 원소 주기율표를 줄줄 외우고 그 원소들의 화학적 특징들이나 반응의 형태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희웅이를 테스트 한 결과 매우 뛰어난 상위 0.6%에 해당되는 과학적 재능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희웅이의 부모님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궁금하게 됩니다. 아이의 뛰어난 재능이 발견되고 성장하는 데는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발굴단은 두 부모님을 대상으로 부모양육태도검사를 실시 했습니다. 공식적인 기관의 조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희웅이의 어머니는 지지표현에서 100점을 아버지는 95점을 받았습니다. 모두 1000명에 한명 꼴로 나오는 점수. 전문가들은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희웅이 부모님은 둘 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술을 보고 말을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말이 좀 어눌합니다. 희웅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날 공부한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희웅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합니다. 부모님들도 아이의 말을 놓치기 싫어서 온 정신을 집중해서 아이의 입술을 바라보고 피드백을 해 줍니다. 엄마는 제가 잘 안들리기도 하지만 희웅이의 말을 더 귀담아 듣기 위해서고, 해줄 수 있는게 없다 보니까 잘 들어주기라도 해야죠자신들의 장애로 아이의 말을 듣지 못하면 실망할까 봐 더 신중하게 듣는 것입니다.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약점이 아이의 천재성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아이와 더 잘 소통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소통을 잘하는 것은 듣는 능력에 있지 않고 들으려는 마음에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또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능력이나 물질적 지원 보다 충분한 수용과 사랑이라는 생각도 하게 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희웅이네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우선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가진 약점으로 괴로워 했고, 또 그 약점을 없애주십사 기도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이용하십니다. 베드로의 즉흥적인 마음을 이용하여 당신의 수제자로 삼으신 것이나 토마스의 의심 많은 성품을 잘 다듬어서 당신을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드신 것이 그 예입니다. 바오로에게는 몸에 가시가 찔리는 듯한 아픔을 주셔서 교만하지 않도록 만드시고, 희웅이 부모님에게는 청각 장애를 허락하셔서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는 법입니다. 이냐시오는 부상을 통해 회심하여 그 위대한 영신수련을 저술 했고 소화데레사 역시 지속되는 병고를 통해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겪는 고난이나 아픔들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그분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빼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모두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온전한 수용이 없다면 하느님의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셨고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같은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계속해서 저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모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기했지만 그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저사람이라는 표현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수용하고 친교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호칭입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선입견과 판단이 그분과의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펼쳐질 구원의 메시지를 스스로 거부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며 예수님은 한탄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와는 달리 약간의 병자들만 고쳐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 하셨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봅니다. ‘너를 안다는 선입견과 편견은 그 사람과의 소통을 단절시켜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나를 안다는 선입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은 나를 믿어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데, 내 자신이 스스로 나를 제한된 틀에 가두어 버립니다. 용기를 앗아 갑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선입견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적들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약점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였다면, 잘 안다는 교만은 하느님의 기적을, 서로간의 소통을 차단시키는 높은 벽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묻습니다. 희웅이 부모님처럼, 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나의 가능성을 열심히 관찰하려 했는지. 그리고 나의 아이들, 나의 가족들, 내 이웃들을 진지하게 마주보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되물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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