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1. 22:44ㆍ말씀묵상/강론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저의 묵상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지는 글이 있어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마틴 슐레스케의 ‘울림’이라는 책에 있는 글입니다.
화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언젠가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곧은 선밖에 알지 못하는 영혼, 구원받지 못한 완고한 영혼을 빗댄 말이다. 많은 것이 이상적이지 않다. 나의 외모, 마음결, 한 걸음 한 걸음 더듬듯이 나아가는 삶. 불완전한 인간 관계, 불확실한 진로, 거기 어느 곳에 작도된 것 같은 직선이 있는가? 그런 마음은 하느님이 똑바로 선을 그을 능력이 없다고 분노할지 모른다. 직선적인 믿음은 일들을 밀고 끌고 잡아당기고 주무르려 한다. 그런 믿음은 스스로 하느님을 가르치려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슬픔의 원인은 나의 삶과 생각과 태도, 그리고 세상이 직선으로 곧게 그어지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창조물 가운데 네모 반듯한 것은 없습니다. 적당히 구부러져 있고 적당히 휘어져 있습니다. 자연을 중시하던 우리 조상님들은 길 하나 낼 때도, 집을 질 때도 그러한 곡선들을 잘 살렸습니다. 그래서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겹고 따뜻합니다. 사람들을 자연과 친해지게 하고 자연 앞에 겸손하게 합니다. 하지만 과학적 합리성, 경제적 효율성과 같은 논리적 완결성을 내세운 현대의 건축물들은 인간의 거주공간을 직선으로, 네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살기 위해 고안한 건물이 우리를 질식시킵니다. 거대한 마천루 앞에서 인간의 위대성에 감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직선으로 뚫린 도로, 계획된 도시는 우리의 사고도 그렇게 직선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직선으로 곧게 그어져야 한다는 환상은 인간이 지닌 선천적 슬픔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담은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음으로써 ‘판단’할 능력이 생깁니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인간 창조의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성과 하느님의 마음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에 대한 근원적인 우화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이 될 때, 그 둘은 점점 멀어집니다. 대화에서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논쟁하기 위함이며 싸우기 위한 것입니다. 논리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직선으로 단정 짓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 서로를 인정하는 원형적, 곡선적 사랑을 소외시킴으로써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질식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적대자들이 등장합니다. 적대자로 볼 수 있는 집단은 첫째, 친척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 부분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기적사화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좀 평범하기를 바랬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랬지만 그분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빗대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성령은 직선적인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 곡선적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분의 친척들은 성령의 이 자유로운 이끄심이 가지고 있는 참된 내적인 평화와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인간이 세운 계획에 따라 움직여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장 큰 적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고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삶이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성령,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하느님 계획에 따른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는 율법이라는 직선에 갇혀 하느님의 자유로운 곡선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자비와 용서, 공감과 사랑보다는 논리와 판단, 비판과 질타, 질투와 경쟁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낮아짐과 내어 놓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 결국엔 하느님을 가르치려 했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창조주를 사형에 처하는 비극적인 인간의 교만과 타락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판단은 결국에 하느님을 죽이는 극단적인 결말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 말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바로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겸손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 굽이진 인생길에서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형제, 자매인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얄팍한 직선의 오만으로 자유로운 성령의 부드러움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내 주위 사람들을 질식시키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판단의 직선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결에 따라 섭리하시는 하느님.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한 나의 단점이나 부족함도 그에 맞게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곱게 다듬어질 것이라는 믿음, 나의 가족과 이웃들도 그 나름의 곡선을 따라 하느님께서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을 이 미사중에 청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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