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4. 09:40ㆍ말씀묵상/강론
오늘은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은 원래 지난 주 삼위일체 대축일을 보낸 그 주 목요일에 거행하는 대축일입니다. 지난 주 강론 때 말씀 드린 것처럼, 삼위일체 하느님, 그 가운데 예수님과 성령이 본질적으로 같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도 성령의 인도로 거행되는 성체성사가 바로 2000년 전 그날의 성체성사와 본질적으로 똑 같은 사건임을 고백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성체성사를 세우신 성 목요일. 그 날의 신비가 지금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성제 안에서 그대로 재현된다는 믿음, 지금도 그렇게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계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목요일에 성체성혈대축일을 거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에 거행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성체성사를 세우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재현되기를 바래서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거행하시고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거행하라고 분부하셨을까? 당신이 죽은 다음에도 그 날을 기억해 달라는 단순한 기억행위일까? 왜 말씀이 아니고 먹을 양식인 빵과 포도주일까? 당신이 남기고 싶으신 말씀만 전해주면 되지 않았을까?
몇 해전 너무나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기억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입니다. 특별히 어머니 김혜자와 아들 이병헌의 화해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던 명장면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딸과 아들, 밥 굶기지 않으려고 후처로 들어간 어머니. 딸은 해녀가 되어 물질하다 목숨을 잃고,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후처가 된 것이 못마땅한 아들 이병헌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미워했습니다. 후처로 들어간 집 두 아들은 작고 힘없는 이병헌을 괴롭혔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번도 그를 두둔하지도 감싸지도 않았고, 그런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지나 성인이 된 이병헌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 그런 어머니 강옥순은 암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아들 이병헌은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에서 지금까지의 울분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머니가 자식 굶기지 않기 위해 견뎌 왔던 수모와 아픔을 만나게 되죠. 마지막 장면,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은 뒤, 다시는 먹지 않았던 된장찌개. 그런데 어머니가 무얼 먹고 싶냐 물으니 된장찌개 먹고 싶다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찾아간 어머니 집. 어머니는 잠든 듯 누워 있고 밥상엔 방금 끓여 놓은 된장찌개와 김치, 그리고 따뜻한 밥. 아들은 어머니의 밥을 먹다 어머니가 숨을 거둔 것을 발견합니다. 그 곁에 조용히 마주 보며 누운 아들. 다시 어머니를 끓어 안고 오열을 하던 아들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을 담담히 읊으며 끝을 맺습니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씨가, 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난 내 어머닐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보며 지난날의 미움과 아픔이 화해로 승화됩니다. 그날의 소박한 밥상은 단순한 한끼 식사가 아니라 살아온 날들의 회한과 아픔이 녹아 있는 음식이요, 어머니와 화해하는 화해의 식탁이며, 앞으로 기억하게 될 어머니의 체취요, 생명이며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제자들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따뜻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고, 엠마오에서 만난 두 제자는 빵을 떼어 나눌 때 비로소 그분을 다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 날, 그 식탁의 빵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소환된 기억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제자들 마음 안에 살아 숨쉬고 있었던 스승 예수님의 말씀이요, 생명이며, 사랑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인간 육신의 살과 피일 수 있냐는 질문이나 2000년 전의 그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지금의 제병과 포도주와 동일한 것이냐는 질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고 싶은 화해의 몸짓과 사랑의 호소를 외면한 건조하고 메마른 불평일 뿐입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해 주신 그 날의 아침식사가 단지 언제나 다시 해 먹으면 되는 물질로서의 음식일 뿐이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거행하는 성체성사는 2000년 그분의 사랑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때의 빵과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육신과 본질적으로 똑 같다는 이성적인 동의는 사실 별다른 힘이 없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빵에 담긴 그 분의 사랑과 희생과 용서를 마음으로 받아 먹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당신이 만들어 주신 밥과 국으로 생명을 얻어 건강하게 잘 살길 소망하는 것처럼, 당신이 내어 주신 살과 피의 빵과 포도주를 우리가 받아 먹음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시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일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먹히우는 사랑의 삶을 살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겠죠.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성체성사는 가족들과 나누는 한 끼 식사보다도 못한 의식행위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끝으로 가톨릭 성가 166번 ‘생명의 양식’의 가사를 음미하고 2절과 3절을 함께 부르도록 합시다.
“이 빵은 나의 몸 너희에게 주노라 내 몸 먹는 자들은 죽음 당하지 않고 영원 생명 얻으리. 나 그를 사랑하여, 나 그를 살게 하리, 나그를 영원히 영원히 살게 하리”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고픈 마음에 당신을 내어 주셔서 먹게 하십니다. 그 몸을 먹을 때 우리는 영원한 삶,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약속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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