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2. 14:22ㆍ말씀묵상/강론
아름다운 밤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 전야미사를 봉헌하면서 동시에 성모의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성령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구세주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밤, 우리가 함께 드린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를 통해 성모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기도이지만 예수님의 온 생애를 묵상하게 하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봉헌하시며 준비하셨고 그분을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으며 예수님의 온 생애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셨고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 사도들의 시대를 함께 하신 분. 성모님은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약속을 담고 있는 교회를 기다리고 맞이하였으며 준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약속과 그 신비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제 1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성경은 전합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 알아듣기 힘든 잉태의 순간입니다. 태어나실 분은 거룩한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천사는 말합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잉태소식이지만 이 영광은 동시에 세속의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할 성모님의 인내와 순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받아 들이기 힘든 잉태의 소식과 예상되는 세상의 비난을 알고 있었음에도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결연한 응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미 이 순간부터 성모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이며 우리 신앙인의 모범임을 드러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이 한 소녀의 작은 응답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룩함의 완성에는 세상의 조롱이 뒤따르겠지만 우리의 결연한 응답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일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제 2단.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심을 묵상합시다.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성모님께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의해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는 성모님은 그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몰라도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우리들이 바치는 성모송의 첫 단락을 환영의 인사로 노래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의 환영인사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의 그 행복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의 참된 행복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엘리사벳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동료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가 되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제 3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복음은 전합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아기는 그곳이 마굿간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첫 아들을 동물의 처소에서 낳게한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은 이미 성모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이미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허락한 사람, 마리아에게 이러한 어려움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당신 아들에게 이루실 놀라운 업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묵상 주제였습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가장 낮은 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당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분명, 이것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제 4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묵상합시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나의 아들은 장차 어떤 인물이 될까?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갖게 되는 기대와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할 것이지만 동시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된다는 예언을 듣습니다. 사실 세상의 반대와 조롱은 이미 예수님의 잉태사건에서 겪은 성모님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조롱은 어머니께 해당되는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당신 아드님이 같은 시련을 당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해하기 힘든 사랑과 그로 인한 십자가의 고통은 예수님만의 몫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 5단.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열두살의 소년 예수님. 한참 개구쟁이일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 예수님. 축제 기간이 끝나고 하룻길을 가서야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는 다시 하룻길을 되돌아 갑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그분을 찾아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아내는데 걸린 시간 사흘. 20년 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전에서 되찾으신 기억은 당신 아들의 부활과 더불어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성모님의 기다림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모든 의미를 알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알게 해 주실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지닌 의미도 언젠가는 하느님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철저히 구세주로 믿은 첫 번째 제자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만났을 뿐 아니라 아들로서 상면했고 그 긴 시간동안 모든 일들을 마음에 새겼으며 하느님 구원의 시작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잉태해내신 사람 마리아. 구세주를 자신 삶의 전체 목적으로 만나게 된 마리아는 그래서 복된 여인이며 모든 제자 가운데 으뜸가는 제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인가 아니면 마리아였기 때문에 예수님 이었는가. 성모 어머님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이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하느님 앞에 서셨던 당당하고 겸손한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그분은 단지 구세주의 어머니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였기 때문에 성모님이며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예수님이 가장 충실한 제자였으며 우리 신앙의 모범입니다. 여인 마리아, 우리의 성모님 신앙고백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계시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