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3. 22:34ㆍ말씀묵상/강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하늘이란 어디서부터 하늘일까요? 동양에서 하늘은 사람머리 끝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닿기 위해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하늘은 여전히 나의 정수리 끝이어서 온전히 도달할 수 없지만, 아무리 낮은 곳에 있어도 하늘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서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온전히 도달할 수 없지만, 언제나 함께 있는 곳.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 하늘로 오르셨으므로 우리가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가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신 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
제가 지난 사순강의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까운 것일수록 우리 시야에서 감추어져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사하기 어렵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시야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쁘고 잘생겼던 내 아내와 남편이 점점 평범해 지다 못해 나와 닮아져서 이제는 남녀가 아닌 오빠 여동생이 되는 것처럼. 또 내 신체를 보더라도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내 눈을 스스로 볼 수 없고, 내 얼굴도 볼 수 없으며, 내 뒷모습도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나는 이처럼 나의 시야에서 멀리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 이유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내 정수리 끝이면서도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지만 늘 나와 함께 있는 것처럼, 내 눈동자와 내 얼굴은 내가 볼 수 없지만 내 자신인 것처럼, 하늘로 오르신 것은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신 것, 바로 나와 하나되신 것 이기도 합니다.
저는 유치원 때부터 아버지 따라 낚시를 다녔습니다. 아버니께서 5학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릴 적 기억 가운데 함께 낚시를 다닌 것이 가장 오래 기억됩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을 때, 기력이 남아 계실 때, 저와 함께 물 맑은 양평에서 몇일 동안 낚시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저도 낚시를 무척 좋아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43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저보다 어린 나이입니다. 그래서 낚시를 가서 앉아 있노라면 나보다도 어린 아버지께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하고 묻곤 합니다. 그리고 찌와 호수, 하늘과 산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겨 있노라면 아버지도 그 때의 강변에서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호수 앞의 나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는 현실에서 사라지셨지만, 그분과의 추억이 있는 곳에 ‘나’로써 부활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아버지는 늘 나에게는 ‘타인’이셨을 수 있지만, 육신이 사라진 지금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유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셨다.
그분은 하늘로 오르셨지만 동시에 늘 그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마치 나의 얼굴처럼, 나의 눈동자처럼, 나의 하늘처럼, 그리고 나의 아버지처럼. 우리들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 때, 우리는 단순히 인간의 일, 지상의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수리 위에 있는 그 하늘을 살고 있는 것이며, 낚시를 하면서 내가 아버지가 되듯, 그분이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분의 옛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되어 드러나는 지금 이순간, 그분의 현재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손끝에서, 나의 말에서, 나의 온 몸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