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4. 09:53ㆍ말씀묵상/강론
대림 2주일은 1982년부터 교회에서 ‘인권주일’로 지정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오랜 시간 인권에 대한 잔혹한 침탈이 있었고,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권리가 온전히 존중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권에 대한 존중이 말살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며 이번 한주간은 사회교리 주간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받을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일의 나치는 세계대전을 벌이고 그 이름도 끔찍한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이 학살의 주범 가운데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가정이나 동네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정한 남편이었고 따뜻한 아버지, 그리고 동네 주민들도 그를 평범한 공무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전법 재판소에서 그는 당당히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결정적인 관여를 한 실무자라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극단적인 악인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악이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 해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인물이 아이히만이며 그의 잘못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생각을 차단한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은 생존을 위한 ‘계산’만을 했을 뿐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저는 생각이 많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정말 ‘생각’일까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 나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합니다. 속이 상하지만 참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 사람이 미워지고, 그의 말이 생각납니다. 길을 가다가도, 전철을 타다가도 생각납니다. 잊어버려야지 하며 잠시 잊은 것 같다가도, 집에 돌아와 손을 씻으면서 불현듯 그 인간이 왜 그랬을까, 잊은 듯 하다가도 밥상머리에 앉으니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리고 고해실을 찾습니다. 신부님 제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어요. 잘 안되요. 그럼 제가 묻습니다. 용서라는게 뭘까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내 마음안에 평화가 오는 것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생각 안에는 내 자존심이 상처 받은 것에 대한 반사적인 자기 보호의 반응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가 있었으며, 그 스트레스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계산’입니다. 내가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나만을’ 위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계산으로서의 생각은 ‘자기’만을 위한 동물적 본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이란 이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것으로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나 나나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그도 잘못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에는 나의 불찰이 있었네. 그래 속이 상하긴 하지만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니, 우선 나부터 변해보자’. 인간에 대한 성찰이며 반성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나를 성숙하게 하고 어른스럽게 합니다. 자기만을 위한 생존의 본능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 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고려하고 배려합니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함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나를 동물적인 인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만 나를 충만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의 성찰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도 하느님 앞에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나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하느님은 부족한 우리를 당신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용서하셨구나.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 보았더라면, 나는 그토록 그를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 주님 용서하지 못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바치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대략 세가지의 차원으로 전개됩니다. 계산으로서의 생각은 오직 나만을 돌보는 동물적 본성입니다. 이 계산은 오직 자신에게 갇혀 있습니다. 반성으로서의 생각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여 참으로 인간다워지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게 합니다. 이 생각은 공동체에 열려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서의 생각은 그 마음을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 나와 그를 봉헌하게 합니다. 참다운 친교가 시작되며 온전한 하느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충만에 이르는 시작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주로 어떤 것이었는지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나만을 위한 계산이었는지, 공동체를 위한 반성이었는지, 하느님을 향한 기도였는지.
오늘은 인권주일이며 대림 2주일입니다. 인권의 침탈은 권력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단지 생존을 위한 계산에 머물 때,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타인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되 돌아 보는 것, 이러한 신앙의 마음이 참다운 인권을 위한 근본입니다. 우리가 대림시기를 보내는 것도 동물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닮기 위한 정화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을 닮는 것이 나의 노력만으로 부족하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며, 내 안에 그분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닮으려는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읽은 바오로 사도의 필리피서의 말씀을 들읍시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시기. 생존을 위한 계산에서 벗어나 사랑을 위한 희생과 나눔과 용서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참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이 미사중에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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