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8. 21:04ㆍ말씀묵상/강론
오늘은 2024년 연중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온 우주와 세상의 왕이시며,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새로운 나라에 들어간다는 그런 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왕’이라는 이 호칭은 낯섭니다. 역사의 기록 안에나 존재하는 이 호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상의 왕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숭배와 존경, 복종을 요구했다면, 그래서 인간의 서열 맨 위에 위치하고 있는 그런 존재라면 예수님의 왕권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이 지닌 왕권의 핵심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은 군림이 아니라 봉사이며 낮아짐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내어줌이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는 통치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통치는 요란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고요함 속의 기다림입니다.
강론을 준비하다 문든 경향잡지 11월호를 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한편의 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끝이 있지만/영원은 끝이 없어/생명은 끝이 있지만/희망은 끝이 없어/길은 끝이 있지만/마음은 끝이 없어/내가 기다리고 엄마는/언젠가 꼭! 영원히/만날 수 있어.
제주에 사는 소년시인 민시우 어린이의 시입니다. 다섯 살 때,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낸 시우는 ‘죽음’이 아직 무엇인지 모를 나이었고,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엄마가 보고 싶다며 거의 1년을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 밖에 흐르는 비를 보며 엄마에 대한 자신의 슬픈 마음을 떠올렸고 그 마음을 ‘슬픈 비’라는 시로 탄생시켰습니다. 시우가 쓴 첫 번째 시였고 그 시를 본 아빠는 아들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 올 때, 시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쓰여진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입니다.
시우를 취재한 기자가 묻습니다. 이제 6학년이 된 시우. 언제 엄마가 가장 보고 싶으냐고.
“솔직하게 말하면요...이제 엄마 얘기가 안 나오는 이상 엄마가 그렇게 생각나지는 않아요. 그게 안 좋은 뜻이 아니라, 엄마를 잊어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옛날만큼 엄마가 막 생각나는 건 아니고 어쩌다 뭔가 영감이 떠오를 때 그럴 때 엄마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시우는 엄마를 잊었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기억속에 존재하면서 어느 순간 떠오르는 영감이나 번뜩임으로 그렇게 시우의 삶과 조우하는 것입니다. 요즘 지어진 시우의 시가 참 아름답고 슬픕니다. 제목은 ‘슬픔의 바깥’입니다.
슬픔이 와서 딱 그만큼 울었다/그리고 엄마 나무에 단단히 묶어두고 돌아 왔다/오늘 밤 슬픔이 비틀 거리고/일렁이며 바람이 분다.
시우에게 어머니의 부재는 이제 슬픔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며 영감입니다. 시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냇물이 조용히 흐르는 오솔길을 걷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가까운 사람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할 때, 시우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조용히 이끌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영감을 주며,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일으켜 주는 용기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우리가 그분을 잊어서라든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론 조용히 또 어떨 때는 따끔한 질타로 우리 삶의 굴곡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분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요란한 통치, 당신을 숭배하라고, 권위적인 억압으로 우리를 지치게 하는 그런 통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렇게 우리를 이끌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지친 어깨를 안아 줄 때, 용서할 때, 조용히 들리는 내면의 음성에 눈물 흘릴 때, 우리는 그 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투와 싸움과 투쟁으로 쟁취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곁에 머물면서 세상과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조용히 이끄는 나라, 이 세상에 이미 와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런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임할 때 아무도 ‘보라,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으며 우리 입술과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17장)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그리고 사랑으로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나라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보내는 우리의 첫 번째 자세일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두 번째의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그날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는 삶. 그래서 우리는 다음주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보내는 것이죠.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보내는 오늘. 잠시 고요한 가운데 우리 마음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다가올 그분의 나라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꾸며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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