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나해 33주일

2024. 11. 28. 21:02말씀묵상/강론

동화 하나 들려 드릴까 합니다.

어느 한 나라에 파티샤라는 교활한 임금이 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임금의 폭정으로 도탄에 빠졌고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교활한 파티샤는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엿들으려고 분장을 하고 성 밖으로 나갑니다. 식당에 가도 자신인 파티사에 대한 분노의 하소연이요, 시장이며 찻집, 술집 어디를 가든 그랬습니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러 날을 성 밖으로 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파티샤에게 당신은 왜 파티샤를 욕하지 않냐고 한마디 합니다. 그는 교활했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목소리를 높여 파티샤를 욕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자신을 욕하다가 비밀결사대에 가입하기에 이릅니다. 비밀 결사대는 폭동을 일으켰고 왕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작전을 모의했습니다. 교활한 파티샤는 궁전 내부며 성곽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반란을 위한 모의에 적극 가담하게 됩니다. 결사대원들은 궁내의 정보에 능한 그를 결사대의 대장으로 추대했고 결국 그는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진격의 날, 무리 없이 성을 통과하도록 경비병을 철수시켰고 밀랍으로 자신과 똑같은 파티샤를 만들어 왕관을 씌우고 진주 목걸이로 치장한 다음 왕좌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 안에 닭의 피를 잔뜩 넣어 두었습니다.

결전의 날. 결사대는 성으로 쳐들어 갔고 우두머리였던 파티샤의 계획대로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왕좌의 위치가 어딘지 알고 있던 그는 제일 먼저 그곳에 도착해 가지고 있던 장검으로 파티샤 인형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붉은 닭의 피가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모두 다 그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렇게 파티샤는 자기를 죽이고 다시 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파티샤는 또 다시 파티샤를 죽여야 하는가?

 

역사에 대한 은유이면서도 우리 인생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다 성장한 내 자신이 되길 바라고 그래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지만 우리의 슬픔과 좌절과 실패는 반복됩니다.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이 악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 13장은 작은 묵시록이라 부르는 부분입니다. 묵시록은 굉장히 난해합니다. 다양한 은유들이 있고 상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것이며,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낡은 마음, 기존의 가치관, 욕망에 따른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판으로 표현됩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기준, 새로운 통치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자비의 심판이며 오늘 독서에서 읽은 것처럼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는그런 심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으며 부활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도 이용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화두는 자아실현’, 혹은 행복입니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정말로 나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는 기쁨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에 대한 감사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행복해지고 싶고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안정되고 싶은가? 사실 용서에 대한 믿음이 삶의 궁극적 출발점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낯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현세적 왕국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행복은 현세의 삶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용서보다 행복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영원한 삶 보다는 현세의 삶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그 모습을 바꿔가며 나타나는 그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희망합니다. 만일 나의 성공이나 성취,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다니엘서와 복음은 새로운 하느님 왕국의 도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 나라는 내가 세운 업적과 성취를 통해 입장권을 따내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용서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감사로써 무상으로 도래하는 나라입니다. 새로운 삶은 내가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용서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은혜로운 이 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느님의 용서에 감사하며, 반복되는 두려움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 영원한 삶을 꿈꿀수 있는 마음을 이 미사중에 청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