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4. 07:59ㆍ말씀묵상/강론
세상 모든 것은 나름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크던 작던, 화려하던 소박하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사랑의 계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10계명이나 613조에 달하는 율법이나, 결국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마음’을 읽어낸다는 것이며 읽어낸 마음에 공감하고 그것을 위해 나를 내주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내가 ‘쓰여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어내고 나에게 원하는 것을 하는 것, 바로 ‘소명’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쓰여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삶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형제로서, 이웃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안에서 각자의 소명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마음, 혹은 사랑만 받으려는 욕망으로 관계를 훼손시킵니다. 이 모든 것 안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소명’, 나의 ‘쓰임새’라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명에 충실한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명 없는 만남은 이기적이 되고, 실망하며, 결국 분열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앞서 하느님 사랑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소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소명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저는 금요일 오후부터는 주일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 성체조배실에 자주 들릅니다. 그제도 저녁을 먹고 성체조배실에 막 가기 직전, 몇 개의 카톡이 올라왔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지난 8월 환경을 위해 함께 활동하는 단체인 ‘하늘땅물벗’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해부터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해 왔는데, 제가 오고 나서 사실상 모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지난 8월 지구의 날 미사를 우리 본당에서 하면서 다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맑은 하늘 벗’팀과 ‘한 처음 들꽃 벗’, 이렇게 두 팀에 총 8분이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카톡에 저도 참여하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여러 가지 환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올리십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임을 함께 한 경험이 없어서 서로 막막했는데,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이분들의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무튼, 오늘의 복음 말씀을 읽고 다시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려는데 이분들로부터 여러 개의 카톡이 도착했습니다. 간단히 확인하고 성체조배실에 앉으려는데, 내 안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인데, 지금 우리가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너무 분명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이 가장 아파하는 것 먼저 살피는 것이 도리아닌가? 하느님께서 지금 가장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의 지구환경일것입니다. 그래서 조배하다 말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올라온 글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활동 보고 및 회의록, 낙동강 녹조 방지대책에 대한 국민청원,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 캠페인부터, 다시 시작된 우유팩 모으기, 그리고 그것을 수거하여 받아온 1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 3장, 1층의 캠페인 포스터 부착.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분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실천한 것들을 나누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양해를 얻어 몇 가지 실천 나눔들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선생님인 것 같습니다.
살기 바쁜데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냥 해봅니다^^
하늘땅물벗 가입하고 시작해 본 작은 일 부끄럽지만 적습니다.
- 학교 아이들이 월수금은 3시 20분경, 화목은 4시 15분 경이면 집에 돌아갑니다. 재잘거리며 뛰놀던 애들이 돌아간 교실과 복도는 지친 듯 조용합니다. 1~5층까지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복도와 화장실의 불을 모두 끕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한다고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싶었고 어색했습니다. 두 달이 다 되어가면서 학교를 돌며 불을 끄는 20여분의 시간에 걷기 운동도 하고, 전기세도 줄 것이고[한 층마다 등 60개(복도 큰 등 25개+소등 11개+화장실 소등 24개)*5층= 300여개 .... 매일 1~2시간 소등된 전기세면? ] 발전소도 덜 돌릴 것이고, 무엇보다 출근 후 정신없이 하느님을 잊고 살다가, 오직 그 시간만큼은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걷고 불끄고만 집중하니 고요하고 차분해지고 불을 끌 때마다 뭔가 속죄하고 보속하는 마음이 들어서 좋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지난번 회합 때 해주신 (좀 냄새나더라도^^) 덜 쓰고 덜 빨고 그런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는 말씀이 내내 생각났습니다. 정말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매님 말씀듣고 요즘 빨래를 더 모아서 ...천연 세제여도 덜 쓰고 섬유유연제 대신 구연산을 녹여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무리 묵상한다 한들, 내 삶에서 그것에 대한 실천이 없다면 모두가 공염불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에게 막연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참 사랑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소명’은 무엇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소명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나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형제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만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돌봅니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고, 나의 만족을 위해 사람들과 피조물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남고 ‘미움’이 남고, 그래서 분열을 낳습니다. 자신은 그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만을 사랑한 것입니다. 나와 관계한 모든 존재에게 나는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지구와 환경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자각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린 이분들의 나눔에서 우리가 지금 먼저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우선적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에 충실하는 것으로 사랑할 때, 우리가 관계한 모든 것들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고 있는가. 그 소명에 ‘예’하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응답을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함께 묵상하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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