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2024. 3. 4. 00:27본당소개/주보성인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St. Antonio Maria Claret, 축일 10월 24일)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에 망명 중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성인은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 존재를 인식했고 이미 11살 때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로 인해 10대를 거의 직물공장에서 보내다가

17살에 도시에 있는 직물 디자인 학교에 입학했다.

 

성실함과 남다른 눈썰미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대규모 방직 회사들로부터 취업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성인은 이후 신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 

27살에 교구 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탁월한 화술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성인은 하루에 7번이나 강론을 한 적도 있으며 

10시간 넘게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성인은 어느날 문득 성모님을 통해 자신이 사도로 양성되었고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같은 복음선포를 다른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1849년 선교 수도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성인은 수도회를 설립한 지 2년 만에 쿠바의 산티아고 대주교로 임명돼 

쿠바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복음전파에 헌신했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들을 세웠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빈민들 자립을 도왔다. 

또한 농민들을 위한 농사법 관련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성인은 1857년 다시 스페인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스페인 여왕이던 이사벨라 2세가 

성인을 자신의 전속 고해사제로 일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성인은 그 와중에도 선교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가톨릭 언론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페인에 

대규모 가톨릭 출판사를 세워 가톨릭 서적 200권을 발행했다.

1868년 이사벨라 2세 여왕이 혁명으로 폐위되자 성인의 입지도 좁아졌다. 

성인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건강이 악화돼 1870년 선종했다. 

성인은 유언으로 묘비에 이같은 말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에 망명 중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성인은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의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이 알려질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께 봉사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 봉사하도록 설득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당신을 찬양하도록 일하게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
인류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게 하시고

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이
당신 은총 속에서 참고 일하게 하시어

마침내 우리 모두가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