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3. 09:20ㆍ말씀묵상/강론
+ 찬미 예수님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통해 우리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강조하는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되돌리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자선과 단식과 기도를 통해 회개와 속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과도한 욕심을 끊고 절제한 것을 이웃과 나누며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재의 수요일 복음을 통해 들은 것처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그리고 숨어서 일하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회복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았나. 남보기 위한 삶을 살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속죄가 진실된 것이려면 그 속죄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첫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는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스토리만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매우 정교하게 씌여져 있고 묵상해야 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갑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루카 복음에 의거하면 예수님은 40일동안 지속적으로 악마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광야에서 단식하며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셨을 것 같은데 성경은 40일간 악마에게 유혹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세상에 당신의 사명을 펼치기에 앞서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40일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배치되는 악마의 유혹을 식별해 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식별을 통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식별의 과정이 40일 이었습니다. 교회가 40일이라는 회개와 보속의 사순시기를 보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그 시간은 철저히 악마와 싸우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 악마와 하느님의 길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면서, 악마의 유혹이 유혹임을 알지도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 내고 그것이 유혹임을 알아차리는 나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반하는 악마의 유혹이 무엇인지 분명히 구분하여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 그래서 이를 통해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식별의 시기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유혹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유혹은 빵에 대한 유혹입니다. 40일간의 단식을 통해 가장 먼저 생각났을 것은 바로 빵입니다. 저도 지난 몇 일 병원에서 금식했는데, 티비를 못 보겠더군요. 트는 곳 마다 음식이 나오는데 군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는 이 틈을 이용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합니다. 빵에 대한 유혹은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유혹에 그치지 않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의미합니다. 배고픔이 해소되면, 더 안락히 지내고 싶고, 더 쾌락을 누리고 싶고, 더 풍족해 지기위해 더 많은 물질을 갖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물질의 욕망은 멈추질 않습니다. 이러한 탐욕은 동시에 일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환상으로 확대됩니다. “돌을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유혹입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코인에 빠져 있는 것도 이러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물질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물질인가, 하느님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며 악마의 유혹을 거부합니다. 물질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며, 짧은 이 세상의 삶 보다 하느님과 누릴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영광과 권세에 대한 유혹입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다”. 그러나 조건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경배하라” 남들 위에 서고 싶은 마음, 교만의 유혹입니다. 가장 극복하기 힘든 죄의 뿌리입니다. 때로는 낮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교묘히 남보다 우위에 있음을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며 세상이 나를 경배하기를 바라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깊어지면 우리는 오늘 악마가 예수님께 했던 똑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저를 위해 일하세요. 이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우리는 섬겨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써 나를 섬기려 하고 물질을 섬기려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아니 그런 악마의 마음에게 ‘주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만 유혹은 의심의 유혹, 불신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그분께서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극도의 고통중에, 아픔 속에 우리는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정말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증거를 보여 주세요. 정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붙들어 주실 수 있는 건가요. 그러나 이러한 원망은 미래에 대한 의심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나에게 주셨던 하느님의 모든 자애와 사랑을 잊어버린 불효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유혹은 예수님께서 해골산에서 괴로워 할 때,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을 때 또 한번 찾아온 유혹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하지만 마지막 유혹에서도 예수님은 ‘주여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셨습니다.
탐욕, 교만, 불신. 예수님도 40일간의 유혹 마지막에 가장 강하게 받은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교만,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불신.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이 모든 유혹에 초연했던 것이 아니라 40일간을 싸워야 할 만큼 우리 육신 안에 깊게 자리잡은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유혹을 이겨내신 것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도 40일간의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닥쳐올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령을 청합시다. 광야에 들어가기 전 세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세례의 은혜를 떠올리며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던 것처럼, 이번 사순시기 말씀을 내 마음에 모시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시킬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