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7. 16:33ㆍ말씀묵상/강론
요즘은 본당에 중고등학생들이 많지 않았지만 제가 그 나이일 때는 성당에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운동도 하고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본당에 선배 형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형은 좀 특별했습니다. 또래 학생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진 형이었습니다. 좀 남달랐습니다. 진지했지만 과하지 않았고 유머도 있던 지혜로운 형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형은 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생들이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 친구가 그 형에게 이유 없이 자기만 보면 심술을 내는 친구가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걔가 누구야? 어떤 녀석이야’라고 반응할 줄 알았는데 그 형은 ‘만일 이유 없이 너에게 심술을 부린다면 그 친구는 마음이 아픈 친구네, 화도 나겠지만 너는 정상이고 그 친구는 아픈 사람이니 이해하려고 해봐’라는 식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린 저는 그 형의 말이 참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남다른 사람들, 예언자적인 풍모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불이익, 고통, 불만, 피해에 초점을 두지 않고 타인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때때로 우리 삶에서 이해하기 힘들만큼 나를 학대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들입니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그 외에 정치적인 폭력 등.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그런 아픔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우리의 시선을 새로운 곳을 향하게 하는 초대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봅니다.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왜 나에게 원수인가?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원수일까? 누군가를 원수라고 규정하게 된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나에게 원수가 되는 기준은 ‘나의 상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며, 그 사람을 원수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원수라는 말 안에는 내 상처, 내 상실, 내 아픔이라는 ‘나의 불이익’이라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는 시선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한정합니다. 선행도, 나눔도 심지어 기도도 자신을 위해 하게 됩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칭찬을 구하기 위함이요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되받기 위함이며 기도를 하는 것도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
선행을 하고 나눔을 한다 해도 되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았을 뿐, 악행을 저지르는 죄인들의 삶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에게 갇힌 시선에서 눈을 들게 합니다. 원수라고 규정하게 된 그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내 마음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원수라 부른 그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보려 애쓰는 마음(쉽지 않지만, 그 사람은 환자입니다), 단지 내 마음과 과거의 기억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인간의 언어는 두가지 문장으로 압축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사랑해’이고 또 하나는 ‘사랑해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악행을 ‘사랑해줘’라고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되돌려 받을 것에 마음이 있지 않고 너는 무엇을 원했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뭔가 다른 사람, 특별한 사람, 예언자적 풍모를 지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도 첫 인간인 아담은 흙에서 ‘생명체’가 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에만 주목하는 인간형이라면 이어서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언자적 삶, 바로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 ‘새사람’이신 그분에 속한 사람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독서인 코린토 1서의 말씀을 다시 들읍시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내 상처에만 머문 마음,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에서 벗어납시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새로운 한주간 자신의 유불리에 갇힌 흙의 사람에서 벗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원수로 단정 짓지 말고 그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내는 영의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길 이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말씀묵상 >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중 8주일 다해 (0) | 2025.03.04 |
---|---|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의 신약성경 특강 영상 (0) | 2025.02.27 |
신약성경 특강 자료-2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0) | 2025.02.19 |
신약성경 특강 자료-1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0) | 2025.02.19 |
연중 6주일 다해 (0) | 2025.02.18 |